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총알이 심장을 꿰뚫었을 때도 아니고, 불치병에 걸렸을 때도 아니며, 맹독 버섯 스프를 마셨을 때도 아니다. 바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이 철학적인 문답은 원피스라는 소년 만화에 등장하는 괴짜 의사가 남긴 유언이다. 가볍게 소비되는 장르의, 심지어 엑스트라에 가까운 인물이 남긴 대사임에도 이토록 진한 여운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정확히 겨누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보이지 않는 폭력이란, 한 존재를 이루고 있던 무수한 서사와 관계를 지워버리고 단 하나의 단어로 대체해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존재는 입체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 복잡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장 편리한 하나의 면만 남긴 채 나머지를 제거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잊힘', 즉 괴짜 의사가 말하는 죽음의 시작이다. 한 존재의 입체성이 사라질 때, 존재는 단순한 기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도 어쩌면 이렇게 서로를 죽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한 존재를 죽이는 방식은 놀랍게도 '이름 붙이기'에 있기 때문이다. 쉬운 사례로, 최근 우리 사회를 가르는 'MZ', '꼰대', '영포티' 등의 이름이 대표적이다. 심플한 이름표 아래 한 세대 안의 다양한 목소리는 하나의 경향으로 압축되고, 다른 세대의 삶의 경험은 철 지난 서사로 전락하여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2.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서로를 죽이려 하는가. 그 시작은 아마도 순수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아주 먼 옛날, 탈레스라는 철학자가 던진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처럼 말이다. 질문은 이해 불가능한 세계를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오려 한 첫 시도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단순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존재의 모든 측면을 한 눈에 볼 수 없다. 작은 동전조차도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듯이 말이다. 대신 하나의 기준을 세워 조각하듯 대상을 재단하고, 기준에 맞지 않는 부분은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세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남게 된 하나의 면에 붙이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은 존재 전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기로 한 단면에 붙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다. 어떤 기준이 보편적이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가장 편리하고 납득하기 쉬운 방식으로 기준을 제시하고, 우리는 그 기준을 내면화하여 타인을 재단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이름의 목적은 변질된다. 이름은 더 이상 세계를 알고자 했던 순수한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효율적인 통제의 도구가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앎을 위해서가 아니라 알게모르게 권력을 위해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견고한 '이름'이라는 질서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를 마주할 수 있을까.
3.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양은영은 저항하듯 실험한다. 작가는 대상에게 더 나은 이름을 찾아주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세상이 붙인 이름을 떼어내고, 그 존재를 이름이 없던 상태, 즉 '보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를 회화로써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방식은 어쩌면 이름의 폭력으로 비롯된 '(사람에게서 잊혀지는) 두 번째 죽음'으로부터 존재를 구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이름 떼어 내기'는 사회가 행하는 '잊힘'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의 폭력이 한 존재의 모든 서사를 지우고 ‘죄수번호 24601’이라는 거짓 이름을 남기는 것이라면, 작가의 실천은 그 '죄수 번호'를 떼어내고 감옥 문을 여는 행위에 가깝다. 즉 사회는 본질을 지워 거짓 이름을 남기고, 작가는 거짓 이름을 지워 본질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 방식은 이러한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집한 이미지를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서로 다른 시간과 상황이 뒤섞이도록 화면 위에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대상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경계를 흐리게 한다. 또한 캔버스를 돌려가며 그리는 방식은 하나의 시점을 고정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타자를 규정하지 않고, 그저 존재가 '있게 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렇게 이름이 지워진 이미지는 판단의 언어를 잃는다.
4.
지시할 대상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떼어진 이름 뒤에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언어로 깎이기 전의 날것 그대로의 상태 혹은 감정은 아닐까. 양은영은 그것을 '물질'이라는 물성으로 제시한다. 감정을 말하는 형용사적 상태는 언어로 이름 붙여지기 이전에, 신체의 경계에서 먼저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다. 언어의 질서에 포획되기 전의 그것은, 우리 몸 안팎을 흐르는 이름 없는 액체나 덩어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캔버스의 표면을 통해 그 감정의 원형을 물질로써 드러내려 시도한다. 〈파고드는 붉은 덩어리〉(2024)나 〈세 가지 장면〉(2024) 등 캔버스 표면의 기름과 뒤섞여 끈적이는 물감의 점성과 질감, 여러 겹 쌓여 굳어진 두꺼운 덩어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감정이 물질과 충돌하는 상태의 흔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현을 포기한 이 물질들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그것은 아마도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무너지는 불안한 상태일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나'를 지키며 살아간다. 내 안의 것과 내 밖의 것을 구분하는 선,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는 질서. 그러나 이 경계는 언제나 불안하다. 나의 것이었으나, 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갑자기 낯설고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나'였지만 더 이상 '나'가 아닌 것들이 있다.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아브젝트(abject)'와 같이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배제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경계의 물질이다.
양은영은 '아브젝트'의 논지를 '괴물성'으로 번역하여 풀어낸다. 황소개구리와 같은 사례들로 말이다. 우리는 1990년대에 황소개구리를 우리 생태계라는 질서정연한 주체로부터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혐오스러운 타자, 즉 '사회의 아브젝트'로 규정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황소개구리의 생물학적 실체는 '잊히고', 언론이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이미지만이 남아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작가가 탐구하는 '괴물성'이란 곧 한 존재가 사회적 이름이라는 폭력 아래 그 고유한 생명성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어야 할 물질적 잔해로 남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잔해를 '혐오물질'이라 명명한다.
〈파고드는 붉은 덩어리〉(2024), <세 가지 장면>(2024)은 이 혐오물질이 캔버스 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화면 중앙의 덩어리는 살점 같기도, 종양 같기도 하다. 끈적이는 물감의 점성과 번들거리는 질감이 왠지모르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만, 그것은 이름의 폭력으로 인해 잊혔던 감정들이, 더 이상 언어로 표현될 수 없어 물질적인 흉터로 터져 나온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5.
그렇게 이름의 폭력이 남긴 흉터는 아물어 사라지는 상처가 아니다. 그것은 잊힌 존재들의 슬픔과 분노를 양분 삼아 원한(ressentiment)이 되어 더욱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이 힘이 가장 강하게 응축되는 곳은 사회의 최하단에 자리한다. 이를테면, 도덕적 질서 바깥으로 밀려난 성노동자,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이름 아래 축출되는 외래종 생물,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혐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수많은 존재들의 자리와 같이 말이다.
〈몸 속에 그득한〉(2025)은 그 응축이 방향을 얻어 움직이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보이지만 핑크색 잠옷을 입은 인물을 거꾸로 배치함으로써 이 풍경을 전복시킨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인물이 화면의 가장 위로 떠오르는 순간, 폭포의 낙하는 인물의 몸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분출'로 의미가 전환된다. 이는 억압된 자의 원한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의지(Will to Power)로 전환되는 기호로 읽힌다.
역설적이게도 사회로부터 부정적이라 낙인찍힌 바로 그 지점에서, 존재는 가장 강한 의지를 발현하게 된다. 그 의지는 어쩌면 망치를 들고 낡은 신전을 두들겨 대던 어떤 괴한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무너진 신전의 폐허 위에서 그는 '추함'과 '부정' 그리고 '상처'와 함께 파티(Amor Fati)를 열었다. 양은영은 이 파티의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부정성의 긍정이라는 가장 낮고 구석진 곳에서의 윤리를 작품에서 드러낸다.
6.
낮고 구석진 곳의 윤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속성을 지닌다. 그렇다고 양은영이 그려낸 파티의 풍경이 꼭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는 억압받던 인간뿐 아니라, 사회의 질서 바깥으로 밀려났던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도 동등한 자격으로 초대된다. 이미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던 작가는 어느새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또한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계의 해체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관계 맺는 평평한 생태계를 화면 위에 펼쳐놓는 것에 있다.
이는 대상을 규정하지 않고 그저 '있게 하는' 작가의 태도가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작가는 황소개구리, 뉴트리아, 비둘기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을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표면과 질감, 그리고 존재의 무게를 그 자체로 드러내려 애쓴다. 이름을 떼어내고 고정된 시점을 거부하는 실천이야말로, 이들을 인간 중심의 서열에서 해방시키는 윤리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지는 이성적인 이해나 도덕적 공감을 강요하는 위치라기 보다 언어나 개념을 넘어서는 감정적 교류에 가까이 있다. 즉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에 스며들어 함께 흔들리는 것으로 정서적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7.
이 평평한 공존의 세계는, 어쩌면 괴짜 의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두 번째 죽음’이 유예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존재를 단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하고 나머지를 제거해버리는 폭력이 무력화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양은영의 회화의 서사가 '회화'라는 평평한 매체의 조건 때문에 더욱 정교하게 완성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회화가 가진 필연적인 조건, 즉 ‘평면성’과 ‘물성’은 작가가 추구해 온 윤리적 태도와 기묘하게 공명한다. 양은영의 화면은 이중적으로 평평하다. 환영적 깊이가 제거된 물리적 평면과 위계가 사라진 윤리적 평면을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회화가 지니는 '평면성'이라는 조건은, 모든 존재를 동등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형식적 토대가 되어준다. 또한 언어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물감의 끈적이는 물성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원형을 날것 그대로 대면할 수 있게 한다.
양은영의 회화가 지시하는 것은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대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회화의 형식과 작가의 태도가 만들어내는 '관계'에 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끈적이는 물감 덩어리(물성)는 언어적 규정을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모든 존재가 동등하게 뒤섞인 화면(평면성)은 그 어떤 규정도 허락하지 않는다. 즉, 회화의 물성은 언어를 갈망하게 만들고, 회화의 평면성은 그 언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작동 구조가 이름 없이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이름의 세계에 저항하는 회화만의 방식으로.